요즘 우리나라 막걸리가 고급화 시키면서 뜨고 있고 최근 1~2년 상이 막걸리 먹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나도 예전에 막걸리는 제사상 나오는제주... 별로 즐기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서 운동후나 산행시는 많이 찾는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운동인 테니스를 하면서 배가 고프면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막소사" 라는 폭탄주(?)를 마시기도 한다
시골에 사는 시절에 특히 초등학교시절 막걸리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우리 가계의 남자는 모두 술을 즐겨 마셨다
할아버지께서는 5일장 시장에 다녀오시거나, 잔치집에 다녀오면 얼근히 취한 상태에서 손자인 나에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 ~
몇차례 반복해서 얼프신다.워낙 많이 들어서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던 시조라 내가 외워 따라 하곤 했다.
당시 주로 주막에서의 먹는 술은 거의 막걸리로...그곳에서 마시고 집에 들어오셨다
막걸리는 추억의 이야기가 스민 술이다
별다른 설비나 기술 없이도 "마구" 걸러 마실 수 있다고 막걸리라 한다지만 "막" 걸러서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술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빚은 술을가양주( 家釀酒)라고 하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발효된 액을 체로 거는 것을 약주나 청주라라하고 남은 술에서 지꺼기만 거르면 탁주인 막걸리라고한다
공정도 간단하고 숙성도 필요없고 싸고 피부미용에도 좋으며 안주 없이도 목넘기기 좋은 술, 또 다이어트에도 좋다고한다
다만, 먹고 나면 트림이 생겨 옆사람에게 미안하게 한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어른 심부름 다니던 어릴 적부터 젖은 손들 핥아가며 맛보던달착지근함,
술지게미의 시금털털하고 고소한 맛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막걸리의 두터운 빛깔과 툽툽한 질감에는 소주나 맥주가 넘볼 수 없는 푸근함이 있다
아버지께선 국민학교 교사로 계셨기 때문에 내가 다니고 집에서 걸어서 15분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박달국민학교란곳이다....
퇴근후 직원들과 학교 옆 주막에서 한잔하시경우가 좀 있었다.
당시 술을 자주 많이 드시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는데...그래도 한번씩 따박골이라는 곳 주막에서 마시고
오시곤 했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희미하지만 따박골이란 곳 조그마한 연못 주변에 감나무등 나무로 우거져있고 사각형으로
만든 예쁜우물과 초가집붕으로 박이 주렁주렁 열리고 ..... 나이드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계셨는데 그 할머니가 주모로 창도하셨는데 지금 말하면 전문적으로 막걸리를 파는곳이 었다
한날 어둔밤에 집에 보리 타작이 늦게 까지 하는데 나를 심부름 다녀오라고 해서 그곳 까지 10분정도 거리인데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가기 싫었다
약간 홈들이 파인 노란 주전자 2개를 들고 받아오는일이 었다 가기 싫지만 잔돈으로 사탕 사먹는 재미로 무서움을 무럽쓰고 산너머 주막까지 받아 오는 일이다
동네 새로 생긴 마을 가게에 말걸리를 팔기도 하였지만 풍류를 읖을 수 있는 곳은 주막이란곳이다
특히 따박골의 주막은...
집에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 먹었지만 ...당시 쌀이 귀한 시대라 국가에서 술해먹는 것을 못하게 하였다
술을 해먹는 집은 세무서에서 술치러 온다면 지서 순경 못지 않게 겁을 내는 기관이었고 걸리면 많은 벌금을 물어야 만 했다
그래서 누룩이던지 빚은 막걸리던지 대나무밭 땅굴(6.25사변때 인민군을 피해 땅굴은 6~7명이 들어 갈 수있게 만들어져 어릴때
그곳에 놀곤 했음)이나 집 뒤 갈비(소나무등 낙엽으로 땔깜)짐 밑, 땅을 파서 넣어두고 짚으로 덮어 숨곤 했었다
국민학교 4~5학년으로 모심는날인가 보리베기 할때인가 기억되는데..어린 나이에 보리베기나 모심기는 힘드는 작업이다
식구들과 머슴 그리고 서로 품팔이 해주는 아주머니들로 하루 종일 하는 일은 성인 어른들도 보통힘든일이 아니지만 당시 그곳을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점심되기 전 새참을 가져오거니 막걸리 먹는 시간에 집에 가서 술과 안주를 가져와 나누어 먹어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내가 할 일은 새 참을 가져오는일이다 .
모심기를 하던 어느날 우리가 경작하는 논에서 걸어 500m정도 되는 집으로 가는데 할머니께서 막걸리는 주지않고 밭으로 가라는 거였다
나는 내 뒤를 따라 오는 사람이 있는지 ..누구인지도 생각 해 내지 못했고 큰소리로 그냥 술 달라고 만 했었다
그 당시는 세무서에서 술 취로 오면 온 동네가 난리가 난다
누구 누구집에서 들켜서 .......곧 온 동네 퍼지게 되고 그 부담은 상당히 컷던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집에도 결국 내 때문에 들키고 말았다
엄청 꾸중을 들었다 그렇게도 주변상황 모르냐고... 당시로서 나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큰 죄가 되어 마음이 몹시 아팠다 .
우리 식구들이 모이면 이때 사건이 항상 이야기되어 한바탕 웃고하지만 .....그때 어린 나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막걸리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내가 처음 술을 많이 먹어던 것은 이웃집 국민학교 동기인 금숙이네 집 잔치날이었는데 동네 친구들과
장난친다고 큰 독에 부어둔 막걸리 술을 퍼먹고 약간 취한 상태에서 논의 집단속에(가을에 벼를 베고 논에 집단을 한곳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가서 한잠을 자고나니 깜깜밤에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식구들은 나를 찾는다고 야단이 났던 것 같다........
내가 공무원을 시작하고 세번째 어느 시골에 근무를 잠시 할때 김덕화란 고향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가 근무하는 국민학교 숙직실에서 늦수그레한 숙직선생님과 막걸리, 두부...술안주를 시켜놓고 제가락을 두드려가면서 타향살이니 홍도야 울지마라든지...
옛날 노래가락을 돌려가면서 밤새 부르며 하루밤을 즐겼던 기억이 새롭다
부산에 내려와서 서부교육청에 근무할때 직원 체육대회(등산대회)를 범어사에서 산성마을 산행을 하고
산성마을 어느 곳에 도착 동료들과 막걸리를 먹었는데 머리가 띵하게 아파오고 취해서 가을 따뜻한 햇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과별 게임을 다마치고 하산할 준비를 하고 놀고 있었다 얼마전 산성 막걸리는 빨리 막걸리를 만들기위해 약을 탄다는 이야기는 공공하게 이야기가 되었다
몇년전 내가 아는 남성스러운 성격의 동갑여자 한분은 술을 꼭 막걸리만 즐겨 마셨다
당시 나는 막걸리를 거의 입에 대지도 안하고 소주나 맥주 정도 였다 같이 술을 먹을려고 해도 취향이 틀려서
술집 선택에 어려웠다
그때 약간 젊은 여자가 어떻게 막걸리를 좋아 할까? 약간 고개를 가우뚱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주변여자 분들이
예사롭게 즐겨 마시는 것 같다..
생탁이라는 간판을 걸고 막걸리 집도 많이 생기고......
막걸리 열풍이 부는 이유가 뭘까에 대해 대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적인 결론은 머리가 아프지 않고
부드럽고 막걸리의 품질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다만 생막걸리는 냉동유통보관이 필수라 보아지고 10도 이하 10일이 경과하면 변질이 될수있다는데 있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양주를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막걸리를 더 좋아 해야 때가 올날이 있을 것이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푸른 산 속을 흐르는 맑은 냇물이여
빨리 흘러간다고 자랑하지 말라
한 번 바다로 흘러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것이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 비치고 있으니
놀다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
-개벽장군을 연모하면서 쓴 詩라고요!-
그녀가 남긴 詩중
가장 에로틱한
감미로움을 느끼게 하는 詩가 있지요....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들여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어드란
구비구비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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